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플라비우스 스틸리코 (문단 편집) ==== 군사령관 ==== 이후 스틸리코의 행적에 대해서는 역시 뚜렷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다만 황제 호위대장이자 황제의 (조카)사위라는 신분과, 테오도시우스 1세가 383년 이후에도 계속 전쟁을 치뤘다는 점을 감안하면 스틸리코가 계속 황제를 수행했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군의 고위 지휘관으로 그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서기 390년경의 일인데, 이때 스틸리코는 [[고트족]]과의 분쟁으로 추정되는 '''바스타르네이 전투'''(390)에서 큰 전공을 세우면서 제국군 지휘부의 최고 서열에 해당되는 군사령관(magister militum, 마기스테르 밀리툼)에 임명되었다. 이때 테오도시우스 1세는, [[그라티아누스]]를 [[시해]]한 참칭자 [[마그누스 막시무스]]와의 내전과 이후 게르만족과의 싸움에서 위기에 빠진 황제를 구출하는 등 대활약했던 용장 프로모투스 장군을 잃었기 때문에 그를 대신하여 스틸리코를 발탁했을 가능성이 크다. 클라우디아누스가 스틸리코와 프로모투스의 관계를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의 그것에 비유했고, 프로모투스의 전사를 계기로 스틸리코와 재상 루피누스의 관계가 악화되었다는 주장 등이 그 근거로 제시된다. 서기 392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후원하던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테오도시우스 1세의 휘하 장군이었던 [[프랑크족]] 출신의 [[플라비우스 아르보가스트]](Arbogast)와 갈등을 빚던 중 원인 모를 죽음을 맞는 사태가 발생했다. 아르보가스트는 그 부친 바우토 장군[* 이 장군의 딸, 그러니까 아르보가스트에게는 누이가 되는 여인이, 나중에 테오도시우스 1세의 장남 [[아르카디우스]]의 황후가 되는 에우독시아였다(...).]과 함께, 원로원에 보관되어 있던 '승리의 여신상' 철거 문제나 테오도시우스 1세의 기독교 국교화 정책에 반발하는 등, 소위 '''이교도 장군'''으로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독실한 [[아리우스파]] 기독교도였던 발렌티니아누스 2세와의 종교적 문제로 인한 --이단VS이교-- 갈등이 심각했고, 따라서 황제의 죽음에 그가 용의자로 지목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아르보가스트는[* 의심받고 있으니, 시해여부에 상관없이 죽지 않으려면 칼을 뽑아야 했다. 시해했을 공산이 정황상 매우 높기도 했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인을 가장했지만 실제로는) 이교도이자 문법 및 수사학 교수였던 [[에우게니우스]]를 황제로 옹립하면서 테오도시우스 1세와 황제가 옹호하던 기독교 세력에 반기를 들게 되었다. [[콩가루 집안|이를 진압하기 위해 바우토의 동생이자 아르보가스트의 숙부였던]] 동로마 제국 총사령관 리코메르 장군이 출전했지만 도중에 병사하면서 사태는 더욱 심각해졌다. 서기 394년, 테오도시우스 1세는 아르보가스트 토벌을 위해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족 포이데라티 20,000명을 포함하여 대군을 편성했다. 여기서 스틸리코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첫번째 부인인 아일리아 플라킬라의 일족으로 알려진 티마시우스와 함께 로마군 최고지휘관으로 이름을 올리게 되는데, 그가 지휘한 [[로마군]]은 서기 394년 가을에 벌어진 [[프리기두스 전투|프리기두스 강에서의 전투]]에서 아르보가스트와 에우게니우스를 모두 전사시키는 완승을 거두게 되었다. 이때 이룬 그의 전공이, 이후 테오도시우스 1세가 그에게 자신의 후계자를 맡기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로 작용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